HOME>포천역사소개>문헌자료
 
아래의 목록을 클릭하세요.

 
 

포천시의 개관

  시의 연혁 및 어원

   
(1) 연혁
시 대 연 혁
고구려시대 마홀군(馬忽郡)
신라시대 신라의 진흥왕, 견성군(堅城郡)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청성(靑城)군
고려시대 태조23년(940)포주, 고려8대 현종 양광도 양주군으로 이속
조선시대 조선제3대 태종왕(1413), 포천현
1914년 3월 영평군이 포천군에 편입
1973년 행정구역개편, 포천면 탑동리가 양주군 동두천읍으로 분리,
12개면(1개출장소)87개리로 구획(대통령령 6452호)
1983년 청산면이 연천군으로 연천군 관인면이 포천군으로 편입,
행정구역은 13개(2읍 11면) 88개리로 구성(대통령령110027호)
2003년 농복합시로 승격, 포천읍이 포천동과 선단동으로 분리
행정구역은 14개 읍,면,동(1읍, 11면, 2동)으로 구성(대통령령6928호)

포천군에 한민족이 정착한 것은 본 군과 인접한 연천군에서 발굴 조사된 유적과 최근 영중면 영송리에서 발견된 선사유적지로 보아 구석기시대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포천읍 자작리, 가산면 금현리, 일동면 수입리, 창수면 추동리의 고인돌과 포천실업고등학교 부근에서 발견된 돌도끼와 화살촉 등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에는 이미 많은 인구가 거주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가산면 금현리에 있는 고인돌 상석의 중량이 약 32톤 가량 된다고 하는데 이 상석을 통나무와 밧줄을 이용해서 석실 위로 올려놓는데 약 200여 명의 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200여 명의 가용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집단의 인구는 적어도 1,000명쯤 되어야 한다. 포천읍 자작리, 가산면 금현리, 일동면 수입리, 창수면 추동리의 고인돌을 중심으로 4개 집단이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이 집단을 움직일 수 있는 협력체나 강력한 지배세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역사시대부터 이 지방의 내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한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古朝鮮)과 성읍국가(군장국가)의 하나인 진한(辰韓)의 전신인 진국(辰國)의 북방경계지역으로 영향을 받아 왔다.
이후 이 지역에는 한(漢)의 분열책으로 유력한 정치집단이 없었다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초기국가시대에 접어들어서 마한의 영향에 속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계속해서 마한을 중심으로 한 백제(百濟)의 고대국가 발전과 함께 백제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었다.
이어 진한 땅에서 흥기한 백제가 마한(馬韓)의 전 국토를 병합하고 그 세력을 북방으로 뻗쳐 한의 세력을 축출하고 그 위에 군림하게 되자 백제의 세포천군개관력하에 들어갔다.
그 후 남진정책을 계속하던 고구려가 475년(장수왕 63)에 백제를 공략하고 한강유역의 광범한 지역이 고구려 판도에 들어감에 따라 포천도 이에 속하게 되면서 비로소 고유의 지명을 갖게 되었다. 즉 마흘군(馬忽郡)의 명칭이 붙여졌으며 명지(命旨)라는 별호도 이 때부터 생겼다. 최근 반월성지(半月城址)를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마흘(馬忽)이라 새겨진 기왓장이 발견되어 이를 입증하여 준다.
신라 진흥왕(540~576) 때에 신라의 땅이 되면서 견성군(堅城那)으로 개칭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청성군(靑城郡)으로 바뀌었다.
신라말기에 이르러 중앙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각처에는 군웅이 할거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진성여왕(眞聖女王) 즉위 후에 더욱 심하여 북원(北原 : 지금의 원주(原州))에 본거지를 둔 양길(梁吉)은 강원, 경기, 황해도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포천은 양길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얼마 후 궁예(弓裔)가 양길을 누르고 세력을 잡아 901년에 국호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고 수도를 철원(鐵原)으로 정하여 포천은 궁예의 후고구려 세력권에 들어갔다.
918년 궁예가 쫓겨나고 그 부하들이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고장에는 궁예와 고려 태조 왕건에 얽힌 유적 및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940년(태조 23)에 고려 태조 창건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한 후에 포주(抱州)로 개칭하였고, 995년(성종 14)에는 십도제 (十道制)를 채택하여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고 포천군이라 개칭하여 포천군의 이름이 처음으로 생겼다. 1005년(목종 8) 도단련사를 폐지하고, 1018년(현종 9) 양광도(楊廣道) 양주군(楊州郡)에 이속시켰으며, 1172년(명종 2) 양주군에서 분리하여 감무(監務)를 두고 포천군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후 200년간 큰 변동없이 내려왔다.
1413년(태종 13) 팔도제(八道制) 실시와 더불어 포천현(抱川縣)이라 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1618년(광해군 10) 포천, 영평을 합쳐 도호부(都護府)를 두고 감영(監營)을 설치하였다. 다시 1623년(인조 1) 포천, 영평으로 분리하고 양주진관(楊州鎭管)에 소속시켰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영평현을 포천현에 병합하고 군(郡)으로 승격시켰으며 1896년(고종 33) 포천군에서 영평을 다시 분할하였다.
1910년 8월 일본의 강압적인 한일합방으로 일제치하에 들어갔다가 1914년에 영평군을 다시 포천군에 통합하였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미?소 양군의 진주와 함께 38선을 분계로 한 국토 분단의 비극은 포천을 두동강으로 만들었다. 창수, 청산, 영중, 일동면의 일부와 영북, 이동면은 소련 군정하에 들어가고 포천군은 나머지 10개 면 67개 리를 관할하며 미군정 치하에 있었으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미군정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 받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포천군청은 한때 부산으로 피난하였다가 9?28수복으로 10월 14일 복귀하였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침공으로 다시 철수하였다가 6월 24일 복귀하였으나 청사가 전소되어 포천면 어룡리에 임시 청사를 두었다가 11월 14일 현 군청소재지인 포천읍 신읍리로 이전하였다. 당시 포천군의 행정구역은 10개 면 67개 리로 구획되었다.
1951년 UN군의 북진으로 38선 이북 지역의 5개면을 탈환 수복하여 행정권을 이양할 때까지 군정하에 북포천이라 하여 북포천군수를 두었다가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행정권 이양으로 12개 면 88개 리로 구획되었다.
1963년 5월 10일 내촌면 화현출장소를 설치하고, 15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포천면 탑동리가 양주군 동두천 읍으로 이속되었다.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로 내촌면 화현출장소가 화현면으로 승격되고 청산면(삼정리, 갈월리, 덕둔리, 금동리 제외)이 연천군으로, 연천군 관인면이 포천군으로 편입되어 행정구역은 13개 읍면 89개 리로 구성되었다.
참고로『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기술된 포천과 영평의 변천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디 고구려의 마홀(馬忽)인데 일명 명지(命旨)라 하기도 한다. 신라 때에 견성군(堅城郡)이라 고쳤으며 고려 초기에 포주(抱州)라 하였고, 그후 포천이라 개칭하여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파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고, 명종(明宗)이 양주를 분리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현감으로 고쳐 만들었다. 관원(官員)은 현감, 훈도(訓導) 각 한 사람씩 두었다. 방리(坊里)로는 현내면(縣內面), 청량면(淸凉面), 화산면(花山面), 내동면(內洞面), 내북면(內北面), 외북면(外北面), 서면(西面)의 9개 면에 총 호수 2,494호이고, 위치는 동쪽으로 가평현의 경계까지 18리, 서쪽으로 양주 경계까지 30리, 남쪽으로 같은 주의 경계까지 36리, 북쪽으로 영평의 경계까지 26리, 경도(京都)까지의 거리가 97리이다.

영평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영평은 원래 고구려의 양골현(梁骨縣)이었는데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때 동음(洞陰)으로 개칭하고 견성군(堅城郡)의 진현(鎭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 9년 동주(東洲 : 철원)에 영속되었다가 예종(睿宗) 1년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두었다. 원종(元宗) 10년 위사공신(衛社功臣) 강윤소(康允紹)장군의 내향(內鄕)이므로 영흥현령(永興縣令)으로 승칭(陞稱)되었으며 조선 태조 때 영평현으로 개칭하였다. 화주(和州)로 승개(陞改) 되었고, 문종 때 영평군으로 개칭되었다. 광해군 때 포천현과 합하여 영흥부(永興府)로 되어 감관(監官)을 설치하였다가 인조 때 다시 영평현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영평현은 양주진관으로 관직은 현령 (縣令)이며, 현북(縣北) 30리에 옛 이름은 유석향(乳石鄕)이고, 지금 이름으로는 화적연(禾積淵)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고 현동(縣東) 30리에 옛 이름은 용곡소(龍谷所), 이름은 와룡암(臥龍岩)이라 부르는 두 마을이 있었다. 방리 (坊里)로는 현내면(縣內面), 하리면(下里面), 서남면(西南面), 조양면(助良面), 주침면(注沈面), 북면(北面)의 6개 면이 있으며 도합 호구가 1,435호이고 인구는 남자 3,014명, 여자가 3,067명이다.
위치는 동쪽으로 가평현과 경계가 되고 서쪽으로는 연천현, 남쪽으로는 포천현, 북쪽으로는 강원도 철원부와 경계하고 경도(京都)까지의 거리는 140리다.


(2) 어원

1) 포천의 옛 이름의 어원
포천을 고구려 시대에는 마흘(馬忽)이라 하였는데 마흘에 대하여「삼지연(三地硏)」에서는 물골[水城] 즉 ‘물이 많은 골(谷)’이란 뜻의 ‘몰골’을 음차(音借)한 것이라고 하였다. 골 마(馬)는 물의 옛말 ‘물’ 또 이것의 옛말 ‘매’를 음차한 것이고, 흘(忽)은 ‘골’을 음차하여 썼다는 것이고, 견성(堅城)은 통일신라시대 때 성을 튼튼하게 수축하고 공수(攻守)의 거점으로 삼았다는 연유로 명명하였으며, 청화(淸化)라 한 것은 고려 성종이 정한 별호라고 한다. 지금의 포천이라는 명칭은 물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없고 외부로 흘러 나가기만 한다고 하여 안을 포(抱), 내 천(川)으로 이름하였다.

2) 영평의 옛 이름의 어원
영평의 옛 이름이 양골(梁骨)이었다고 한 것은「삼지연(三地硏)」에서 ‘터것골’을 음차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골 양(梁)은 터(基)의 음차이고 골(骨)은 ‘곧’이므로 ‘것’(거칠다 즉 황(荒)의 어음)의 음차이다. 따라서 ‘터가 거칠다’는 뜻의 ‘터것골’을 한자를 빌어서 양골현(梁骨縣)으로 쓴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top
 
 
 
 
 

굿모닝뉴스